미디어인천신문

[역사속의 오늘-10월26일] 조선 후기 실학자 ’최한기’...(氣) 철학 정립

이경식 2021. 10. 26.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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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철한 기자                                       승인 2021.10.26 10:45

[미디어인천신문 김철한기자]1803년 오늘 19세기 조선 최고의 지식인으로 수많은 저작을 통해 경험주의적 인식론(認識論)을 확립하여 선험적(先驗的) 이론이나 학설을 배격하고 사물을 수학적ㆍ실증적으로 파악할 것을 주장해 한국 사상사에 근대적 합리주의를 싹트게 한 최한기가 출생했다

 

그는 1,000권이 넘는 저술을 통해 기존의 성리학과 서학, 그리고 불교를 넘어서는 기학이라는 독창적인 사상을 정립했다. 선진 실학자들이 들여온 서학서(西學書)를 연구하여 서학의 과학 기술적인 면을 수용할 것을 주장하는 한편 교육에 특별한 관심을 두고 직업교육을 제창했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대 저술가로 평가된다.

 

육해법 [규장각 소장본]

 

▲서양 학문을 소개하다 

최한기의 본관은 삭녕(朔寧) 호는 혜강(惠岡)이다. 황해도 개성에서 아버지 최치현의 차남으로 태어난 그는 1825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평생 동ㆍ서양의 많은 서적을 수집하고 학문 연구와 글 쓰는 데 몰두했다.

 

세계 각국의 천문ㆍ지리ㆍ정치ㆍ농정ㆍ수리(水利)ㆍ수학ㆍ의학 등 서양 학문을 소개하는 많은 저술을 통해 서양 과학기술의 도입을 적극적으로 주장한 그는 농업과 농업기술에 관심을 가져 ‘농정 전서’ㆍ‘수시 통고’ 등의 농서와  ‘만기요람’ 등의 책을 참고하여 ‘농정회요’(1830년)를 저술했다. 또 ‘육해법’(1834년)에서 관개를 위해 양수기 사용을 주장했다.

 

1839년 ‘의상 리수’에서 천동설과 지동설 가운데 한쪽만을 따르는 것보다 두 주장을 서로 참고하여 두루 이해하는 것이 좋음을 지적했고 1857년에 쓴 ‘지구전요’에서 세계 각국의 지리, 역사, 학문 등을 비롯하여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내세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과 근대 원소의 개념 등 많은 서양과학 내용을 소개했다.  또 영국의 유명한 천문학자 허셜(Herschel, W.)의 책을 번안하여 서양의 천문학을 알리는 '성기운화(1867년)을 저술했다.

 

국가와 세계는 하나의 도덕으로 지배되어야 하며 그 도덕적 기초는 '인'(仁)에서 출발하는 박애와 자애로 본 그는 기존 정치적ㆍ사회적 모순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귀천과 관계없이 사회 각 분야의 재능 있는 사람들을 두루 포괄하여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1851년부터 일종의 인사 행정에 관한 이론서인 ‘인정’(人政)의 편찬을 구상해 1860년에 25권의 대작을 완성했다. 1866년에 지은 ‘신기천험’에서는 당시 서양의 의학지식과 약학 내용을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했다. 

 

▲기학

이러한 책을 통해 그는 세계 여러 나라의 견문과 생각을 집대성하여 자신의 학문을 ‘기학’이라 명명했고 이를 전 세계 지식인에게 전파해 주기를 희망했다. 

 

기학은 성리학적 이기론 가운데에서 우주의 본질은 ‘이’(理)가 아니라 ‘기’(氣) 임을 그는 강조했다. 그는 기학의 핵심 개념으로  ‘운화’(運化)를 제시했다.

 

이는 본래 하늘과 땅의 운행과 기상의 변화 등 자연의 움직임과 변화를 총괄하여 지칭한 말이다. 천지의 운화, 음양오행의 운화 등으로 쓰이다가 기로써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성리학적 세계관이 보편화함에 따라 기의 유행 변화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었고 이러한 운화를 기의 근본적인 성질을 ‘활동 운화’라 하고, 크고 작은 만물이 기의 활동으로 반응하여 ‘만물 운화’를 이루는데 이를 통합하여 ‘운화기’(運化氣)라고 했다.

 

기학을 뒷받침하는 그의 관련 저술은 ‘신기통’과 ‘추측록’을 합본한 ‘기측체의’(1836년)와 ‘기학’ 그리고 기학적 경세ㆍ실현의 문제를 주로 다룬 ‘인정’ 등이 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당시 위정척사론자들이 청과 서양인을 배척의 대상으로 이해한 것과는 큰 차이를 보여 외국과의 통상을 우해 개항하고 개화사상을 주장함으로써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을 잇는 가교자로서 역할을 했다.

 

또한 유학의 오륜과 인의ㆍ예율을 강조하여 세계가 평화롭게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과 학문과 정치는 불가분의 관계임을 강조했는데 이는 당시 세도가나 유림이 독점하던 당대 사회를 비판하면서 올바른 정치를 요구한 것으로 조선의 주류 사회는 그를 철저히 외면해 그는 죽을 때까지 학계의 이른바 ‘왕따’였다.

 

*출처: 다음 백과 /두산 백과 /온라인 커뮤니티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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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김철한기자#역사속의 오늘#기학#인정#최한기#운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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